과학기술과 ICT를 핵심으로 한 기술과 산업융합은 미래 먹거리뿐만 아니라 의료, 에너지, 복지 등 국가적 이슈의 해결책을 줄 수 있다. 본지는 `융합으로 새 길 여는 과학기술ㆍICT` 기획 시리즈를 통해 과학기술ㆍICT 융합의 필요성을 짚어보고(8월29일자 1, 13, 14면), 과학기술과 ICT 융합 현장을 소개한다. 기초과학 SW업체 모비스(9월5일자 13면), 조선산업에 ICT를 융합한 현대중공업(12일자 11면), 현대자동차 수소연료전지차 연구현장(26일자 11면)에 이어 나노계측 시장을 선도하는 파크시스템스의 원자현미경 제조현장을 찾았다.
경기도 수원 광교테크노밸리에 위치한 파크시스템스. 장비테스트실로 들어서자 10여명의 엔지니어들이 소형 냉장고 만한 크기의 장비를 앞에 두고 점검을 하고 있었다.
파크시스템스는 물질을 수천만 배 배율로 원자 단위까지 보여주는 초정밀 측정장비인 원자현미경 분야 세계 선두기업이다. 엔지니어들은 생산이 끝난 원자현미경이 정확하게 작동하는지 테스트하는 중이었다. `전자산업의 쌀'로 불리는 실리콘 웨이퍼에서 생명 비밀을 담고 있는 세포, 디지털 산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 고분자까지 각 장비가 들여다보는 물질은 제각각 달랐다.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는 "원자현미경 탐침(probe) 끝에 달린 원자 몇 개와 관찰하고자 하는 시료 표면의 원자가 주고받는 힘을 레이저를 쏴서 포착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흑연을 원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연결된 컴퓨터 화면에서 입체등고선 같은 울퉁불퉁한 3차원 영상이 나타났다. 흑연 표면이 마치 산같이 나타난 것.
◇원자 들여다보는 연구장비에서 첨단 산업용 장비로=박상일 대표는 원자현미경을 발명한 켈빈 퀘이트 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현미경을 발명할 당시 바로 그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지내면서 개발 전 과정을 혼자 해낸 인물이다. 미국에 PSI라는 벤처를 설립해 세계 최초로 원자현미경을 상용화 한 그는 미국 회사를 매각하고 97년 국내에 파크시스템스를 설립, 고성능 원자현미경 시장을 개척해 왔다.
이 회사의 강점은 뾰족한 바늘 모양의 탐침이 측정하려는 시료와 부딪히지 않는 `비접촉식'이라는 것. 브루커 등 세계적 계측장비 회사들은 구현하지 못한 방식이다.
탐침이 시료를 직접 콕콕 찍는 경쟁사와 달리 시료에 닿기 직전 탐침이 멈춰 힘을 측정한다. 마치 비행기가 초저공으로 비행해 지상을 샅샅이 훑듯이 더 정밀한 관측이 가능하다. 탐침 끝 부분을 더 날카롭게 만들 수 있어 해상도가 더 높고 탐침 내구성도 더 좋다.
박 대표는 "경쟁사와의 기술 격차가 최소 5∼10년은 난다"며 "남보다 먼저 시장에 뛰어들어 제품을 개발했고, 끊임없이 혁신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첨단 HDD, 반도체 정밀관측=연구용 장비로 출발한 원자현미경은 원자세계를 다루는 산업현장에서도 필수 장비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하드디스크드라이브, 반도체 등 전자부품들이 갈수록 고집적화하면서 수요가 커지고 있다. 바이오, 나노 등 과학기술 연구자들도 중요한 수요자들이다.
파크시스템스 매출은 30%가 HDD, 10% 반도체, 60%는 대학이나 연구소, 기업부설연구소의 연구 및 결함분석 시장이 차지한다. 연매출은 약 200억원.
특히 테라바이트 시대로 가면서 각종 부품을 0.1나노미터 수준으로 제어해야 하는 HDD 대표기업들이 대부분 고객사다. 시게이트, 웨스턴디지털, 히타치GST, 호야, 쇼와덴코 등이 공장에서 이 회사 원자현미경을 이용해 제품을 생산한다.
박 대표는 "나노구조물의 가장 선두를 달리는 산업이 바로 HDD"라며 "HDD 내에 정보를 저장하는 비트 사이즈와 데이터를 읽고 쓰는 헤드 구조물이 0.1나노미터 미만으로 컨트롤돼 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다. 실리콘 웨이퍼 표면의 매끈함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원자현미경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웨이퍼 표면이 거칠면 결함과 불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전자를 시료에 쏴서 전류이미지를 통해 형상정보를 얻는 전자현미경으로도 표면을 볼 수는 있지만 깊이 정보를 알 수 없다. 원자현미경으로는 반도체의 회로 선폭과 3차원 구조물 모양, 전기적 특성 등도 정밀하게 잴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D램을 발명하는 등 세계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개척해온 IBM도 고객사다. 반도체 양산에 앞서 R&D 과정에서 나노구조를 관측하기 위해 6개월간의 장비 평가를 거쳐 지난 8월 정식 구매계약을 맺은 것.
박 대표는 "세계 반도체 기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기업에 장비를 공급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IBM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소이텍 등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구매를 타진해 오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실리콘 웨이퍼 제조사인 일본 신에츠(Shin-Etsu)도 작년 말부터 웨이퍼 제조에 이 회사 현미경을 활용하고 있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LG전자, LG디스플레이,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국내 주요 기업들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LED, 태양전지 등 첨단제품의 수율과 결함분석에 장비를 쓴다.
◇롤렉스 시계, 살아있는 세포도 들여다본다=콘택트렌즈에서 샴푸, 섬유, 시계 등 전통산업에도 쓰인다. 특히 최근에는 세계적 시계회사인 롤렉스가 구매서를 보내왔다. 시계 안에서 돌아가는 수많은 톱니바퀴와 축 등의 마모를 줄여 시계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나노미터 단위로 표면을 분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세포도 관측 대상이다. 광학현미경으로는 세포를 볼 수 없고, 전자현미경은 세포를 죽여 말린 후 관찰할 수 있다. 반면 원자현미경은 액체 속에 담긴 살아있는 세포 표면을 볼 수 있다.
박 대표는 "지금까지는 살아있는 세포의 표면을 볼 수 없었는데 일본 니가타대 우시키 다쓰오 교수가 우리 현미경으로 구조를 연구하면서 연구성과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초정밀 제조기술이 발달하면서 기존 측정센서들을 나노미터 크기로 만들어 원자현미경에 달면 적용분야는 훨씬 커진다. 앞으로 개척할 시장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원자현미경은 전자현미경에서 포착할 수 없는 깊이 정보까지 읽어낼 뿐만 아니라 끝에 어떤 센서를 다느냐에 따라 모양 외에 압력, 자기, 전기, 열 특성을 나노미터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전천후 나노계측장비'"라고 설명했다. 탐침으로 시료를 조작해 나노미터 크기 물체를 만들 수 있는 만큼 제조공정에 직접 쓰일 수도 있다.
회사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0∼15%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지만 기술력은 압도적으로 1위라고 자부한다. 때문에 고성능 산업용 시장은 거의 다 차지하고 있다. 1억원 짜리 장비를 팔면 6000만원이 이익으로 남는 만큼 이익률도 높다. 그러나 이익은 대부분 R&D 등에 쓰기 때문에 순익은 크지 않다.
박 대표는 "나노산업이 빠르게 커지는 만큼 기술을 혁신시켜 가다 보면 반도체, 바이오, 제약산업 등에서 또 다른 기회를 만날 것"이라며 "나노스케일 대량생산 등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시장도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국내 연구자들은 연구장비는 해외서 사다 쓰는 것이란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데, 자연현상을 규명하고 못 보던 세계를 보기 위해 새로운 도구를 만드는 과정이야말로 창조"라며 "그 과정에서 신산업이 잉태할 수 있는 만큼 연구장비에 대한 연구자와 정부 인식과 시각이 확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안경애 차장ㆍ이준기 기자ㆍ허우영 기자ㆍ남도영기자 naturean@